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동로마 제국/정체성 (문단 편집) == 고대 로마에서 이어지는 연속성 == [[파일:external/andrearsinian.files.wordpress.com/constantine-burning-cross.jpg]] 제국이 확장하여 다양한 민족들이 로마의 시민-즉 '로마인'이 되고, 이로 인해 문화와 제도면에서 많은 변화를 겪었지만 [[고대 로마]] 시절부터 내려오는 학문과 기술을 성장시켜 [[로마네스크]], [[로마법 대전]] 등으로 중세 유럽시대를 이끌어갔다. 하지만 [[15세기]]에 제국이 [[오스만 제국|오스만국]]에게 멸망하자 제국의 인력이 이탈리아 등으로 건너가 [[르네상스]]의 시발점이 되었고, [[성 소피아 성당]]과 같이 [[이슬람]] 세력에게 정복당한 지역의 문물은 도리어 [[이슬람]] 문화에 영향을 주었다. 로마가 제정으로 바뀐 뒤에도 녹색당과 청색당과 같은 시민 조직들이 황제의 폐위와 즉위에 크게 관여했다는 것은 로마가 공화정적인 전통을 끝까지 버리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주요 왕조 혹은 주요 황제들이 속한 왕조들도 오래 가지 못했거나, 계승 방식이 깔끔하지 못했고 변칙적인 경우가 많았다. 첫 왕조인 율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왕조도 아우구스투스 사후 50년을 겨우 넘겼으며, 아우구스투스-티베리우스-칼리굴라-클라우디우스-네로 간 부자상속이 한 번도 없었다. 콘스탄티누스 왕조도 콘스탄티누스 1세 사후 채 30년도 못 갔다. 유스티니아누스 왕조도 유스티니아누스 1세 사후 채 40년도 못 갔으며, 헤라클리우스 왕조도 유스티니아누스 2세의 첫 퇴위 기준으로[* 코 잘리고 와신상담을 꿈 꾸었다가 성공시켰지만 또 반란을 당해서 그 때는 죽었다.] 헤라클리우스 사후 50년을 좀 넘겼고, 마케도니아 왕조가 순수 기간으로는 200년 가까이 간 것 같지만, 로마노스 1세, 요안니스 1세, 니키포로스 2세 등 왕조 혈통과 상관없는 사람들이 중간에 재위했는가 하면, 왕조 말기에는 공주 둘만 남았는데 공주들은 왕자들과 달리 단독 통치가 어려웠고 결혼을 통해 부군을 만들어서 부군과 함께 통치해야 했었다. 다른 전제 군주국들과 로마의 비슷하면서도 다른 점이기도 한 것이 이것이다. 둘 다 쿠데타가 일어났지만, 쉽게 왕조 교체가 일어나지 않은 다른 나라와 달리 로마는 '''시민들의 지지가 곧 황제의 정통성이었다.''' 이것이 로마에 남은 마지막 공화정적 전통이자 로마의 후계구도가 마지막까지 불안정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이기도 하고, 신격화나 신의 대리자로 권위를 다지려 시도는 했지만 결국 실패했던 것도 마찬가지 이치다. 수많은 황제들이 기독교 공인 이전부터 시작해 수세기 동안 황제 권위의 신격화를 위해 노력했지만 끝끝내 정교분리 원칙이 성립되고 말았다. 동로마 시기에도 흔히 알려진 바와 달리 교회와 황제는 종속 관계가 아니라 대등한 관계에 가까웠다.[* 단,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총대주교는 어디까지나 기독교 세계관에선 서열 2위였기에 교황만한 권위는 결코 누릴 수가 없었다. 이 서열 문제는 정교회에서 신봉하는 공의회에서 정한 사항이라 지금도 그렇지만 정교회에서 맘대로 바꿀 수가 없는 문제다. 서유럽은 간혹 어떻게 보면 교회가 우위에 있는 듯 보였지만, 그건 서유럽인들이 무식하여 종교성이 강해서가 아니라, 교황은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보다 권위가 높았던 반면에 서유럽의 각국 군주들은 동로마 황제보다 권위가 떨어졌던 점이 서로 중첩되었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서유럽에서는 (서로마 이후를 말하는 거니 당연히 로마는 제외하고) 개별 왕국·왕조가 있기 전부터 교회가 존재했지만, 동로마에서는 그 반대로 교회가 있기 전부터, 심지어 예수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로마라는 나라가 있었다. 제국 이전을 포함하면 말할 나위도 없고, 제국으로만 따져도 옥타비아누스가 [[아우구스투스]] 존호를 받은 '''기원전''' 27년을 일반적인 제정 성립의 기준으로 삼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왕조는 몰락해도 새로운 황제를 받아들여 국가는 지속시킬 수 있었음으로(왕조 바뀐다고 황제의 넘버링이 초기화되고 그런 거 없이 쭉 누적되었다.) 동로마 제국 독자적으로도 천 년 넘는 세월을 버텨낼 수 있는 힘이 되어주기도 했다. 즉, 일장일단. 한편 동방을 벤치마킹하고 본격적으로 전제군주화됐다고 하는 동로마 제국도 황제에게 더 많은 권한이 주어지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행정, 예산, 법률의 삼권분립을 진행하는 등 생각보다 훨씬 공화적인 모습을 많이 보이는데 물론 이는 한때 공화정이었던 로마 제국으로부터 내려오는 유산이었다. 또한 혈통으로 제위를 계승받은 황제보다 쿠데타를 일으켜 즉위한 황제를 (혈통빨로 꽁(?)으로 먹지 않고 능력으로 쟁취했다는 측면에서) 당대 역사가들이 더욱 높이 평가했던 기록이 남아있는 등 여러 모로 전형적인 전제군주정과는 거리가 멀다. 오죽했으면 동로마 군주정이 일반적인 전제군주정보다는 공화정 전통이 남아있는 '''로마 특유의 전제군주정'''이라 평가하는 최근의 관련 저서인 Anthony Kaldellis의 The Byzantine Republic을 보다 보면 동로마 황제는 '''경우에 따라 세습도 가능한 초강력 종신 대통령'''으로 여겨질 정도다. [[지지율]] 관리를 적절하게 해서 여론이 호의적이면서, 집안의 후계자가 능력이 그럭저럭 괜찮으면 세습하는 것도 받아들여지는 반면, 능력과 치세가 괜찮더라도 지지율 관리가 안 되어 인기가 없거나[* [[마우리키우스]]가 이 대표적인 케이스로서, 충분히 괜찮은 군주였음에도 불구하고 쿠데타로 죽음을 맞았다. [[바실리오스 2세]]도 마우리키우스의 [[상위호환]]인데, 그 업적에도 불구하고 [[대제]] 칭호를 받지 못했다.], 혹은 후계자가 영 아니면 불만 여론이 조성되고 이를 이용한 [[정권교체]]([[쿠데타]])[* 한 번 황제가 되면 기본적으로 죽을 때까지라서 정해진 임기가 없기 때문에, 수단은 쿠데타밖에 없었다.]가 받아들여지곤 했다. 로마는 [[아우구스투스]]마저 온갖 편법을 활용해 황제라는 직위를 만들어야 했을 만큼 시민들의 영향력이 강했다.[* 다만 당시에는 시민=군인이었고 군인들 입장에서는 당시에 전역하고 땅도 안 주는 원로원보다 자신들을 챙겨주는 지휘관을 더 지지했다. 당장 카이사르의 개혁도 전역 군인들을 위한 정책이 많다. 훗날 영토가 더욱 넓어졌을 때 로마에서 일어난 황제 교체는 시민들의 지지 때문이 아니라 선대 황제 사후에 시민권을 얻기 위해 군에 입대한 군인들이 자기 지휘관을 황제에 올리기 위해 반란을 일으킨 것이 대부분이다.] 그렇다보니 계승 원칙조차 두루뭉실했던 것이 수천 년 역사 동안 그 수많은 내란의 원인이기도 했다. 게다가 아우구스투스가 있던 시기는 기술의 한계로 인해 더 이상 공화정 유지가 불가능해진 과도기였다. 더 큰 혼란을 막기 위해서라도 제정의 설립이 필요했기에 시민들이 용납했다고 보는 게 로마 제국의 역사 동안 이어진 생각이다. 10세기 증흥기 이후 들어 로마의 고대 공화정에 대한 고찰이 로마 제국 학자들 사이에서 다시 일어난 것도 이런 연유로 볼 수 있다.[* 아우구스투스는 내전을 종식시키고 최고 권력자가 되었을 때 그는 군사지휘관인 임페라토르(Imperator)였으며 칭호는 제1시민(Princeps: 프린켑스)으로 불렸다. 카이사르와 같은 종신 독재관(Dictator: 딕타토르)은 아니었으며 원로원 중 한 사람이었고 집정관도 아니었다. 다만 호민관의 일부 권위를 가지고 있었고 후임자에게 이 임페라토르와 호민관 특권을 물려줄 수 있었다. 형식적으로 2인의 집정관은 꾸준히 선거로 뽑았으며 제일 먼저 발언하고 반발없이 원로원이 승인해주는 형식이긴 했지만 어쨌든 원로원의 의사를 존중했다. 이런 기형적인 지배방식(이를 원수정이라 칭한다.)을 통해 로마 시민들은 공화정이 부활했다고 받아들였으며 원로원 역시 이를 받아들였다. 실제로 마리우스 - 술라 - 카이사르로 이어지는 독재관들의 지배로 인해 당시 시민들에게 제대로 된 공화정이 무엇인지는 책 속의 이야기였으며 이미 독재가 더 익숙한 상황이었다.] 제정 말기 게르만족을 필두로 [[마자르]] · [[바이킹]] · [[무어인]]들의 집중적인 침략으로 인해 점차적이기는 하나 확실하게 고전 문명의 방대한 이데올로기적 일치감과 이를 현실에서 물리적으로 뒷받침할 관료제 · 상수도와 도로로 대표되는 경제적 체계가 재건 불가능하게 파괴당한 [[도나우 강]] 서쪽(서유럽/남유럽)과 달리, [[발칸 반도]]와 [[그리스]] · [[아나톨리아]] · [[레반트]] 지역의 로마 세력은 훈족의 침략 및 [[사산조 페르시아]]와의 대립을 비교적 순조롭게 극복하여 고전 문명의 찬란함을 서방만큼의 단절성 없이 유지해왔다. 그래서 이노우에 고이치(井上浩一) 등 몇몇 일본 역사학자들은 동로마 제국을 '기독교화된 그리스인의 로마 제국(キリスト教化されたギリシア人のローマ帝国)' 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이것도 앞서 각주와 마찬가지로 연구와 편의를 위한 것이다. 기독교화는 이미 2세기부터 진행되던 변화고, ([[그리스인]]이라는) 민족·종족적인 정체성도 무려 12세기부터나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하지 그전에는 그런 관념 자체가 보편제국 속에 용해되어 드러나지 않고 있었다. [* 'Transformations of Romanness' 20p, 'An ethnic image of a Roman genos only appeared in Byzantine historiography in the twelfth century.'] 일반적으로 학자들이 이 나라를 이의없이 비잔티움 제국이라 부르기 시작하는 것은 7세기 중반 이후의, [[그리스어]]가 제1언어가 되었으며 [[타우루스]] 산맥 밖의 거의 모든 아시아 영토 및 [[카르타고]] 주변을 제외한 거의 모든 아프리카 영토를 뺏겨 유럽·지중해·중동 일대에서의 최강국 위치를 이슬람 제국에 완전히[* 7세기 초의 [[사산 왕조|페르시아]]와의 전쟁 중에도 뺏겼었다고 할 수 있으나, 전쟁 중의 일시적인 현상이었지 확정적인 것은 아니었다. 물론 당대 사람들이 이슬람에게 당했던 것도 이것도 페르시아 때처럼 일시적이려니 했을 수도 있지만, 불운하게도 그 열세는 [[아바스 왕조]]가 구심력을 잃고 메소포타미아 밖의 땅들을 거의 모두 상실하고 난 9세기 후반까지 약 250년간은 굳어져 있었다.] 내주고 나서의 모습이다. 즉 보통 [[이라클리오스]] 황제가 [[고대 로마]]의 전통을 끝내고 [[중세]] 동로마 제국을 열었다는 시각이 꽤 많으며, 현대 그리스에서도 이 견해를 받아들이고 있다.[* 이는 주로 정치적인 이유가 크다. 민족주의 사관으로만 이해하면, 동로마 제국이 로마 제국일 경우 그리스인들은 무려 [[가이우스 마리우스|마리우스]]와 [[술라]] 시대 이래로 [[19세기]]에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독립하기 전까지 2천년 가까운 기간 자신들의 독립된 민족국가를 가져본 적이 없는 민족이 되기 때문이다. 현대 튀르키예인들 중 적지 않은 일부가 바로 이 논리로 그리스를 비하하고 있는 이상, 적어도 현대 그리스에게 이는 아주 몹시 민감한 문제가 될 수밖에 없다. 로마 제국은 보편 제국이었기에 그 제국이 그리스어를 쓰든 라틴어를 쓰든 구성원에 더 이상 이탈리아인이 있든 없든 별로 큰 문제가 아니지만, 오스만 제국 치하에서 힘겹게 독립했고 튀크키예와 지금도 역사 문제로 갈등을 빚는 그리스인들 입장에선 이는 단순한 옛날 역사 얘기가 아닌 것이다.] 다만 물론 이슬람의 침입과 성상파괴론의 등장 등으로 제국이 격심한 혼란에 빠져든 소위 "7세기의 위기" 기간 동안 로마 제국이 겪은 변화가 크긴 하였으나, 다른 시기보다 그렇게 큰지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6세기 말~7세기 초의 로마 제국과 7세기 말~8세기 초 로마 제국은 어느 정도 달라지긴 했지만, 도시 국가 로마 시기와 이탈리아의 맹주이던 라틴 연합 시기, 포에니 전쟁 승리 이후 지중해의 패권자가 된 시기, 2세기의 전성기를 누리던 시기와 3~4세기 점차 외부의 위협으로 인한 혼란에 빠져든 시기의 로마'''들'''이 겪은 그 모든 변화보다 그렇게 낙차가 크진 않았다. 4세기, 6세기, 8세기 로마를 비교해 보면 8세기 로마는 6세기 로마와 공통점이 더 많다. 한편으로는 1세기부터 12세기까지 한 번도 단절되지 않고 이어져 왔던 제국은 굳이 로마/비잔티움으로 나눠 보면서, 정작 진짜 한 번 망하고 재건되었던 1204년 이후 제국은 같은 나라로 본다는 건 앞뒤 논리가 맞지 않는 인식이라 할 수 있겠다. 그래서 1204년에 한번도 끊어지지 않고 꾸준히 이어오던 노바 로마 중앙정부가 파국을 맞이한 것을 두고 이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로마제국이 멸망한 것이고 1204년 이후의 각 동로마 세력들은 이를 계승하려는 '계승국'에 가깝다는 시각도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말이다. 이러한 역사적 평가를 두고 학계에서는 여러 논란이 있지만[* 고대 로마적 전통으로부터 중세 비잔티움 제국으로 이행하는 과정은 점진적이었으며, 이라클리오스 한 개인이 담당한 역사적 역할이 아니었기 때문.], 동로마 제국이 7세기 이후로 어떤 형태로든 이전과는 다른 모습을 띄게 된 계기를 제공한 황제로써의 기점이 이라클리오스 임은 분명하다. 근래 영미권 사학계 저술에서는 서로마가 멸망한 것과는 관계없이 이라클리오스 전후 시기를 분기점으로 해서 그전까지는 동로마에 대해서 '로마'라고 지칭하고, 그 이후부터는 '비잔티움'이라고 지칭하는 경우가 많이 보인다. 실제로 제국이 범 지중해적인 패권국이었던 것은 이라클리오스 시기가 마지막이라서,[* 서지중해에서 로마 자신을 제외하고 가장 강했던 카르타고를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결정적으로 거꾸러뜨린(그 이후의 카르타고는 멸망하기까지 속국 신세를 면치 못했다.) 기원전 202년, 그리고 동지중해에서 가장 강했던 [[셀레우코스 제국]]을 [[마그네시아 전투]]에서 꺾고서 타우루스 산맥 너머로 밀어버린 기원전 190년 즈음의, 즉 기원전 3세기 말 ~ 2세기 초부터 7세기 초중반의 페르시아 전쟁 때까지, 약 800년간 인근의 지중해, 유럽, 중근동 일대에서 로마는 심지어 아틸라의 [[훈족]]이 강성하던 5세기 중반에도[* 동-서로마는 공식적으로 분리된 적이 없으므로 당연히 동-서로마 합쳐서. 게다가 전근대 [[유목 제국]]의 특성상 정주 국가에 비해서 실 국력 대비 전투력이 유난히 세다는 점, 즉 반대로 말하면 전투력 대비 실 국력은 많이 떨어진다는 점 또한 고려해야 한다.] 국력 지표상 항상 1등을 유지해 왔다. 그런데 이슬람 제국의 등장으로 2등으로 굴러 떨어진 것이다.][* 유스티니아누스 재정복 이후로 안티오키아, 예루살렘 등 레반트의 주요도시들이 함락되는 610년대 초반까지, 그리고 전쟁을 [[피로스의 승리]]로 끝맺어 전쟁 전의 땅을 되찾은 후 (이슬람에게 얼마 안 있어 뺏기기 시작하지만) 로마는 現 스페인, 프랑스, 이탈리아 일부의 해안선을 제외한 (보통 좁은 의미의 지중해에서는 빠지는 [[흑해]]를 제외하면) 지중해의 모든 해안선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서고트 왕국]], [[프랑크 왕국]], [[랑고바르드 왕국]]의 해군력은 로마에 맞서기에는 한참 역부족이었다. 교황령의 독립 및 카롤루스의 서로마 황제 대관 시점에서 거의 150~200년 전이라, 느슨하게나마 서유럽의 게르만 세력들을 포함한 전체 기독교권의 명목상의 종주국으로 인정받고 있기도 해서 (이 당시 라틴어를 사용했던 서유럽의 저술가들도 자국이 아닌 동로마에 대해서 '(sancta) res publica'((신성한) 공화국)등으로 높여 불렀다.) 서고트나 프랑크가 로마와 지중해의 제해권을 두고 해전을 벌일 이유도 없었다. 서고트는 로마가 페르시아와 한창 전쟁 중이었던 624년, 즉 바로 이라클리오스 당대에 現 스페인 동남부 해안가의 모든 로마령을 탈환하고서 다시 이베리아 반도를 통일했지만(즉 로마 상대로 교전을 걸어서 영토를 뺏었지만), 딱 거기까지로 이베리아 반도에 안주했을 뿐 이전의 반달인들처럼 배 타고 아프리카를 점령하려는 시도는 한 적이 없다. 오히려 7세기 중·후반 이슬람 세력이 북아프리카로 치고 들어왔을 때는, [[순망치한]]이라 생각했는지, 서고트가 자기네 군대를 파견해서 동로마를 도와주었던 적도 있다.] 범지중해적 패권을 잃고 나서는 (법통상으로는 여전히 분명한 로마이지만) 더 이상 '로마'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추락해 버렸으며 성격 또한 다소 달라졌다고 보아[* 공식석상에서의 그리스어의 공식화 및 전면화, 고대 도시 문화의 쇠퇴, 주요도시 및 해안 요새화, 민정-군정이 분리된 디오클레티아누스 이래 3단계 지방행정체제(대관구-관구-속주)에서 민정-군정이 일체화된 테마 제도로의 변화 등.] '비잔티움'으로 부르는 것이다. 이를 반영한 것인지 [[https://en.wikipedia.org/wiki/List_of_Roman_emperors|영어 위키백과 로마 역대 황제]] 문서에서는 영토가 [[고대 그리스]]인들의 활동범위로 축소되고 본격적으로 [[그리스어]]를 사용함으로써 동로마만의 독특한 문화가 발아된 시점인 [[이라클리오스 왕조]]부터 [[팔레올로고스 왕조]](610-1453)까지 800여년을 후기 동방 황제(Later eastern emperors)로 나누어 기술하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